퇴직연금 수령방법, IRP 계좌로 내 통장에 받기 전 꼭 알아야 할 3단계 절차
나는 두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중 한 어머니는 나를 이유 없이 품어 키워주신 분이었다. 피로 설명되기보다 사랑으로 설명되는 어머니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받고 살았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 사랑은 더 크고 깊은 것으로 다가온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셨을까.
젖을 뗄 무렵부터였는지,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른 때부터였는지, 나는 이미 그 품 안에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오래 살았으니 정이 들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가족이었으니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말들이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다.
그 사랑은 이유보다 먼저 있었다.
내가 착해서도 아니었고, 특별히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서도 아니었다. 어린 나는 그저 그 품 안에서 자랐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 안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에 가고, 세상을 배웠다.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해왔다.
인생에서 무너져야 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 인생이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내 안에는 평안과 마음의 여유, 기쁨과 따뜻함이 주어졌다.
나중에 어떤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참 희한해. 그런 일을 겪고도 쉽게 무너지지 않더라.”
그 말이 내 상태를 잘 설명해주었다. 내가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황을 이길 만한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평강이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은혜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하나님 앞에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이 길을 잘 가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말로는 “은혜입니다”라고 하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살피고 있었고, 정작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평강도 그랬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그것은 “내가 경험한 평강”이 되어 있었다. 은혜를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은혜를 붙들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창세기의 가죽옷 장면이 다르게 다가왔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은 줄 알고 스스로를 가렸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숨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전에는 이 장면을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 제물 되심을 예표하는 이야기로, 또 인간의 부끄러움이 가려지는 은혜의 장면으로 이해했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그 장면이 조금 다르게 마음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그들이 정리된 뒤에 받아주신 것이 아니었다. 숨고, 가리고, 두려워하는 그 자리에서 이미 덮을 것을 준비하고 계신 분이셨다.
그 옷은 단지 나의 수치를 가려주는 것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난 나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도 받아들이는 표처럼 다가왔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럴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구나.
그때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이 떠올랐다.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나를 품고 있던 사랑. 내가 이해하기 전에 이미 나를 받아주고 있던 마음. 그것이 창세기의 가죽옷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아주 조금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삶에 먼저 주어졌던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를 비추는 작은 창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설명하기 전부터, 이미 나를 받아들이기로 뜻하고 계셨던 분처럼 다가왔다.
적어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도,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허락되는 위로도,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도 아니었다.
내가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준비되어 있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흔들린다. 여전히 나를 확인하려는 습관이 남아 있다. 내가 괜찮은지, 믿음이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자꾸 살핀다.
하지만 한 가지는 조금 분명해졌다.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아들여진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은혜란 내가 붙드는 무엇이 아니라, 내가 알기도 전에 이미 나를 덮고 있던 가죽옷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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