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수령방법, IRP 계좌로 내 통장에 받기 전 꼭 알아야 할 3단계 절차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쉽게 상처를 줄까요? 분명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어느 순간 서운함이 쌓이고, 기대가 생기고, 실망이 찾아옵니다.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마음 한쪽이 허전해지기도 합니다.
돌아보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젊을 때는 사랑이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설레고, 하루 종일 그 사람이 떠오르고,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세상은 그것을 사랑이라 말했고, 나 역시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식으면 사랑도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겪고, 성경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감정일 수 있지만, 감정만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의 파도나 도덕적인 희생으로 좁혀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한순간의 뜨거움보다 한 사람이 평생을 걸어가는 존재의 방향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나는 아주 낯설고도 불편한 질문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나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조금씩 내려놓게 만드는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깊은 자리에는 생각보다 치열하고 서늘한 역설이 있습니다. 바로 ‘나 없음’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눈이 멀 만큼 강력하게 끌리는 감정적인 사랑도 있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끼리의 깊은 우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장 깊이 보여주는 사랑은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상대가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시작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가 부족하고, 나를 실망시키며, 때로는 나를 아프게 할 때조차 쉽게 끊어지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경이 이 사랑을 인간이 억지로 쥐어짜 내서 만들어야 할 성품으로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소유하고 자랑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내가 주체가 되어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사랑하려 하지만 이내 미워하고, 품으려 하지만 판단하며, 상대를 먼저 생각하려 하다가도 마지막 순간에는 내 마음과 내 안위를 먼저 챙깁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열심만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내가 꽉 붙들고 있던 자아의 껍질이 조금씩 벗겨질 때, 내 안에 머물던 은혜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 가깝습니다.
내가 사랑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자리를 내어드릴 때 사랑은 내 삶의 통로를 통해 조용히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할 때 ‘케노시스’, 곧 ‘자기 비움’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종종 오해됩니다.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붙이거나, 나를 없애버리는 자기파괴적인 희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비움은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일입니다.
우리는 대개 내가 기준이 되어 세상을 봅니다. 내 감정이 가장 먼저 이해받아야 하고, 내 자존심은 상해서는 안 되며, 내가 아는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합니다. 어느새 나는 내 삶의 중심을 넘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견고한 자리가 흔들릴 때 시작됩니다.
내 판단이 언제나 옳다는 자리에서 잠시 내려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내 자존심을 증명하려 애쓰는 대신, 상대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조금 넓혀주는 것. 이것이 자기 비움의 실제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안의 완고한 자기중심성이 은혜 앞에서 얼마나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의 첫 번째 속성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가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사랑의 모습은 뜨거운 감정의 말보다, 견디고 머무르는 삶의 태도에 더 가깝게 묘사됩니다.
우리의 감정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쉽게 불타고, 또 쉽게 식습니다. 기대가 무너지면 서운해지고, 서운함이 쌓이면 마음은 금세 닫힙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곁을 지킵니다. 모든 감정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쉽게 버리지 않는 방향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억압이 아닙니다. 상처를 아무 말 없이 삼키라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 감정이 흔들릴 때에도, 생명 쪽으로 다시 돌아서려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감정을 계속 뜨겁게 유지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감정이 약해지고, 기대가 흔들리고, 내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에도 끝내 생명 쪽을 향하려는 존재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모자란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말하면서도 쉽게 상처를 입고, 또 너무 쉽게 타인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많은 순간 사랑조차도 은밀한 거래와 투자, 그리고 이내 밀려오는 실망의 연속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완벽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한계와 비어 있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억지로 쥐어짜 내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던 자리에서 내려와,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으로 서로의 곁에 머무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가 끝까지 증명해야 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조금씩 비워질 때 내 안에서 살아지는 삶에 가깝습니다.
인생이라는 낯선 순례자의 길 위에서, 오늘 내 주체성과 자존심을 아주 조금만 내려놓아 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사랑은 누군가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가 중심에서 한 걸음 비켜서는 순간 조용히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물러섬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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