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붙잡으려 했던 믿음, 나를 쉬게 한 평안
1. 앎의 한계와 시선의 변화
믿음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어떻게 일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히 알아야 믿음도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싶었고,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고,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의 믿음은 어쩌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고, 무서운 것을 막아 주고, 길을 잃지 않게 붙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거의 전능한 존재처럼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도 피곤해하고, 말없이 고민하고, 실수도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순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아이는 아버지가 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변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2. 내가 만든 이미지와의 씨름
믿음의 여정도 그와 닮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을 믿으려 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고, 간절한 기도에 답해 주고, 불안한 마음을 금방 잠잠하게 해 주는 분을 생각했습니다. 마치 삶의 모든 위험에서 나를 구해 주는 슈퍼맨 같은 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했지만 기다려야 했고, 믿는다고 했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의 상은 흔들렸습니다. 내가 믿던 모습이 맞는 것인지, 내가 붙잡은 확신이 정말 진실한 것인지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흔들림은 실패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은 그분 자체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어떤 이미지였다는 것을 조금씩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울 때는 그분도 두렵게 느껴졌고, 내가 외로울 때는 그분도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통제하고 싶을 때는 그분도 내 계획을 도와주셔야 하는 분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상은 그분의 참모습이라기보다, 그분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길을 걷는 방식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끝없이 의심합니다. 어떤 사람은 논리로 자신을 설득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열심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겉으로는 모두 다른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우리는 자기 자신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마음, 내가 납득하고 싶은 마음, 내가 통제하고 싶은 마음,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3. 흔들림이 남긴 거울과 은혜
그 과정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고 나면 그 시간들은 좋은 교과서가 됩니다. 그때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무엇을 믿음이라고 착각했는지 돌아보게 해 줍니다. 의심도, 논리도, 열심도 모두 지나고 나면 나 자신을 비춰 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자신이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믿음이 약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마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지나온 복잡한 길까지도 조용히 의미 있는 이야기로 엮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요즘의 나는 예전처럼 많이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물론 배움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히 설명하고, 더 분명히 붙잡으려는 마음보다 지금은 쉬는 마음이 더 좋습니다.
공기 안에 있으면서 공기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공기를 정의한다고 해서 숨을 더 잘 쉬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공기는 붙잡을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숨을 쉽니다. 공기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숨이 쉬어진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음을 압니다.
4.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은 평안
믿음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분을 다 알지 못해도, 그분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해도, 마음 깊은 곳에 이상한 쉼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릅니다. 불안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 조용히 숨이 쉬어지는 자리가 있다면, 그것이 이미 그 안에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평안은 모든 것을 이해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일지 모릅니다. 내가 붙잡으려 했던 믿음보다, 나를 조용히 쉬게 하는 평안이 더 깊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의 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이미지 안에 가둘 수 없고, 내가 가진 언어 안에 완전히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상이 정확한가를 끝없이 따지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지금 내게 비추어지는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마음. 그것이 내가 지금 누릴 수 있는 믿음이고, 쉼이며,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숨 쉬고 싶습니다.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고, 다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붙잡으려 애썼던 시간이 있었기에, 이제는 붙잡히는 평안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어쩌면 더 많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평안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평안 안에서 조용히 숨이 쉬어진다면,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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