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나무의 크기를 보지 않았습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뜨거웠습니다.
거의 두 달 동안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았고, 한낮 기온은 자주 35도를 넘나들었습니다.
얼마 전 강변을 걷다가 낯선 풍경 앞에서 걸음을 늦췄습니다.
한여름인데 바닥에는 마른 나뭇잎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습니다. 산책로 주변의 풀은 푸른빛을 잃고 겨울 들판처럼 말라 있었습니다.
강의 물줄기도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물이 겨우 남아 흐르는 곳 가까이의 풀들만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넓은 강변의 나머지 부분은 겨울 억새밭처럼 보였습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가뭄을 걱정하며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풀과 나무가 타 죽는다.”
그 말이 무엇인지 그날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농부의 자식으로 자랐고, 한동안 농산물 유통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풀이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압니다.
밟혀도 다시 일어나고, 잘라내도 다시 올라오고, 이제는 죽었겠다고 생각한 자리에서도 어느새 새순을 내미는 것이 풀입니다.
그런 풀이 한여름에 겨울처럼 말라 있었습니다.
나무들도 버티기 위해 잎의 일부를 말려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과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돌아오자 생명이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이틀 동안 비가 내린 뒤 어제 다시 같은 강변을 걸었습니다.
풍경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말라 있던 강에는 어느새 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겨울처럼 보였던 산책로 옆 풀밭을 자세히 보니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작은 푸른 풀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들판 전체가 푸르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누가 풀에게 다시 살아나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풀이 지난 며칠 동안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쓴 것도 아닙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물이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살아 있던 것이 반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성경에서 물이 생명과 연결되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말씀과 성령, 피와 물이 각각 놓인 자리와 의미는 다르지만, 그것들이 생명과 씻음과 새롭게 됨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물을 설명할 때보다 물이 끊긴 들판을 본 뒤에 물의 소중함을 더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지는 나무를 찾아가 붙지 않습니다
강변을 걷다가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우리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들으며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잘 붙어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나무의 가지를 생각해보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가지는 다른 곳에서 생겨난 뒤 자기가 살아갈 나무를 찾아가 붙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무에서 나옵니다.
나무에서 오는 것을 받아 자랍니다.
가지가 나무의 진액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매일 떨어지지 않으려고 힘껏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무의 생명이 가지로 흐릅니다.
가지는 그 생명으로 자랍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가지에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열매 맺는 신앙’이라는 말도 조금 다르게 들렸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섬겨야 하고, 믿음이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두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을 ‘사람의 열매’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열매를 바라보는 방향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만들어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보다 먼저, 내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풍성한 잎과 좋은 열매는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부의 자식으로 자라고 농산물을 다루면서 오래 보아온 모습이 하나 있습니다.
작물이 자라기에 환경이 아주 좋으면 몸을 크게 키우는 데 힘을 많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키가 자라고, 잎이 무성해지고, 줄기가 굵어집니다.
보기에도 좋습니다.
반대로 기온이나 수분 같은 조건이 좋지 않을 때에는 모습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현장에서 보았던 일부 작물은 몸집을 키우는 대신 열매나 결실 쪽에 힘을 모았습니다.
과일은 크기가 작아도 맛과 당도가 유난히 좋을 때가 있었고, 배추도 크기는 작지만 맛이 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물론 어려운 환경이라고 언제나 좋은 열매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면 작물도 결국 상하고 죽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 농작물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겉으로 크게 자라는 것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먹는 과실을 맺는 나무들도 그렇습니다.
과수원의 나무는 대개 사람이 감탄하며 올려다볼 만큼 장대하지 않습니다.
가지가 이리저리 뻗어 있고, 해마다 잘리고 또 잘립니다.
때로는 나무의 외양만 보면 볼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농부가 과수원에 들어가 보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나무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보다 올해 어디에 꽃이 피었는지 보고, 가지의 상태를 살피고, 어떤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를 봅니다.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나무의 자랑스러운 외양이 아니라 그 나무가 살아 있고 무엇을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지금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은 아니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다 아브라함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그의 삶을 처음부터 천천히 따라가 보면, 처음부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기다리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자기 종이 상속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물었고, 결국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자신에게 가장 귀한 이삭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자리에 섭니다.
예전에는 그 장면을 읽을 때 아브라함의 대단한 믿음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것이 함께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얼마나 오래 데리고 가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때도 데리고 가셨습니다.
기다리지 못할 때도 함께하셨습니다.
자기 방법을 선택했을 때에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 긴 시간을 지나 처음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이라는 열매를 스스로 만들어 하나님께 보여드린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가꾸어 믿음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신 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께서 맺으신 열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농부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농부의 자식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그 말이 오래 남습니다.
농부는 계절을 압니다.
언제 가지를 잘라야 하는지 알고,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도 압니다.
잎이 무성하다고 그것만으로 좋은 나무라 여기지 않고, 볼품없다고 쓸모없는 나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가뭄을 지난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것과 죽은 나무도 구별합니다.
그리고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가지에서 익은 열매를 재촉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잎이 무성한 계절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늘어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도 많아집니다.
그것을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하나씩 줄어드는 계절도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지고,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내 삶이 초라해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무가 작아지는 것과 열매가 사라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긴 생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의 마지막에 남은 가장 큰 것은 더 많이 가지게 된 모습이라기보다, 가장 귀한 것까지 맡길 수 있게 된 한 사람의 변화였습니다.
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제 강변에는 다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은 것처럼 보였던 풀밭에서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작은 푸른빛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삶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크게 만들며 살아왔을까.
잎이 무성해지는 것과 열매가 맺히는 것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무언가 줄어들고 떨어져 나갈 때마다 그것을 실패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나무는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비를 맞고 햇볕을 지나고, 가지가 잘리는 계절을 지나며 자랍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가지의 열매는 가지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에서 생명이 오고,
농부가 가꾸고,
계절이 지나고,
마침내 가지에 맺혔습니다.
아직 강변 전체가 푸르러진 것은 아닙니다.
마른 풀 사이로 작은 푸른 풀 몇 포기가 보이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아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얼마나 크고 화려한가보다,
그 안에 생명이 흐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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