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AI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걸까
어릴 적 TV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검은 자동차 한 대가 있었습니다.
운전자가 말을 걸면 대답했고, 위험을 먼저 알아차렸으며, 필요하면 스스로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운전자를 알고 있었고,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때로는 사람보다 먼저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미국 드라마 《전격 Z 작전》에 등장했던 인공지능 자동차 KITT, 우리에게는 ‘키트’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했던 존재입니다.
그때는 공상과학이었습니다. 자동차가 사람과 대화하고 상황을 판단해 돕는다는 설정은 현실과 멀리 떨어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AI와 대화하고 함께 글을 쓰며 일을 맡기는 모습을 보면 그때의 상상이 다시 떠오릅니다. 우리가 AI에게 바라는 것도 조금씩 키트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더 똑똑한 AI보다 나를 계속 아는 AI
새로운 AI 모델이 나오면 사람들은 성능을 비교합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답하는지, 글과 코드를 얼마나 잘 쓰는지, 어려운 문제를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가 관심의 중심이 됩니다.
하지만 AI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성능표에 잘 드러나지 않는 바람도 생깁니다.
어제 나와 이야기했던 AI가 오늘도 나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어떤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매번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합니다.
저 역시 AI와 함께 글을 쓰면서 그런 마음을 느낍니다. 문장 하나를 잘 다듬어주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왜 이 글을 쓰기로 했는지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몇 달 전에 함께 정한 원칙을 꺼내 지금의 판단과 맞춰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침에는 휴대전화로 대화하고 낮에는 컴퓨터로 일을 하더라도, 함께하던 맥락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능과 화면이 바뀌어도 협력자는 같은 존재로 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키트의 매력에도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빠른 속도와 첨단 장비만큼이나, 주인공 마이클을 알고 그의 곁에 계속 머문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고 싶은 AI도 그런 모습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나를 오래 기억하고, 필요할 때 더 깊이 생각하며, 내가 하지 못하는 일까지 도와주는 존재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고 싶어 한다
우리는 왜 이런 존재를 원할까요.
일을 줄이고 시간을 아끼려는 이유가 먼저 떠오릅니다. 혼자 감당하기 버거운 일을 나누고, 모르는 것을 물으며, 중요한 순간에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바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한계를 넘고 싶어 했던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보입니다.
망원경으로 더 멀리 보고, 자동차와 비행기로 더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문자와 책으로 기억을 남겼고, 의학을 통해 질병과 죽음에 맞서왔습니다. 몸이 닿지 않는 곳에 가고, 자기 생애가 끝난 뒤에도 생각을 남길 방법을 찾아온 것입니다.
모든 기술의 발전을 하나의 욕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주어진 한계 안에 머물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은 그 과정 곳곳에 드러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미래를 완전히 예측할 수도 없고, 우연과 상실을 자신의 뜻대로 막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도 죽음 앞에서는 유한한 존재로 남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 경계 너머를 향합니다.
모르는 것이 없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원하지 않는 일은 막으며, 소중한 것은 잃지 않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바람을 끝까지 밀고 가면 인간이 오랫동안 신적인 것으로 여겨온 능력에 닿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할 수 없는 일이 없으며, 시간과 죽음의 한계에서도 자유로운 힘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은 거창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모르는 것이 두렵고, 잃는 것이 아프며, 자신의 삶을 뜻대로 붙잡고 싶은 익숙한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신이 될 수 없다면, 그 힘을 소유할 수는 없을까
인간은 자신의 몸과 지능만으로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 밖의 힘에 기대고, 그 힘을 빌리거나 손에 넣을 방법을 찾습니다.
여기서 AI를 바라보면 조금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스스로 신이 될 수 없다면,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나를 위해 기억해주는 존재가 있으면 됩니다. 복잡한 일을 이해하거나 해결할 능력이 부족해도, 그것을 대신할 지능을 언제든 불러낼 수 있으면 됩니다.
그 지능이 나를 알고, 내 목적에 맞춰 판단하고, 실제로 행동하기까지 한다면 어떨까요. 그 힘을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커진 것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AI에 기대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이 상상도 멀리 나아갑니다.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고, 미래를 더 정확하게 예측하며, 질병과 노화처럼 인간이 쉽게 넘지 못했던 한계를 해결하는 데까지 도움을 바라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원하는 존재에는 중요한 조건이 붙습니다.
그 힘은 내가 필요할 때 응답해야 합니다. 나보다 뛰어나더라도 내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되고, 인간이 정한 경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의 능력 일부를 가졌지만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
조금 거칠지만, 우리가 꿈꾸는 AI의 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신이라는 말은 AI가 실제로 전지전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그 존재에 투사하는 기대의 크기를 가리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지키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바람입니다. 뛰어난 능력을 원하면서 그 사용 범위를 정하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그 합리적인 요구와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같은 자리에 겹칠 수는 있습니다.
신처럼 큰 힘은 원하지만, 그 힘 앞에 자신이 종속되기는 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능력을 가진 존재를 자신의 명령 아래 두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보면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은 다른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신적인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그 힘을 자신의 뜻대로 행사하는 자리에 서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AI를 통해 얻고 싶은 것 가운데에는 ‘소유할 수 있는 신’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형상에 신적인 능력을 더한다는 것
성경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구절을 떠올리면, 오늘의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따라 지능을 만드는 장면에서 묘한 역설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AI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인간의 지식을 배우며, 질문에 답하고 계획을 세우게 합니다. 글과 그림을 만들고, 상황을 살펴 판단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가진 한계는 넘어주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형상을 따라 만든 지능에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을 더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다시 인간에게 종속시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AI에는 인간의 모습이 두 번 비칩니다. 하나는 우리가 가르친 언어와 사고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존재를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 욕망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넘어 ‘내 뜻으로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가’를 향합니다. 나 자신은 여전히 유한하더라도, 내 명령에 응답하는 힘만큼은 한없이 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AI는 인간이 만든 정교한 거울처럼 느껴집니다. 그 거울에는 도움받고 싶은 사람과, 신적인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함께 서 있습니다.
더 큰 힘을 가지면 인간의 한계도 사라질까
이 생각은 저 자신에게도 돌아옵니다.
AI가 지난 대화를 기억하고, 제 의도를 이해하고, 복잡한 작업을 알아서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 제 안에도 있습니다. 그 바람이 더 커졌을 때 어디까지 맡기고 싶어질지는 저 역시 쉽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을 아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실수를 줄이고 싶어지고, 더 나은 판단을 하고 싶어집니다. 더 멀리 가면 잘못 선택할 가능성까지 없애고 싶어질 수도 있습니다.
AI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능력뿐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삶, 앞날을 몰라 망설이지 않아도 되는 삶까지 함께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내 곁의 지능이 강해지는 것과 내가 내 삶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같은 일일까요.
AI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도, 그 능력을 무엇에 쓸지 정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두려움과 욕심이 남아 있습니다. 더 큰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에서 멈추고 싶은지까지 저절로 분명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관계 안에는 또 다른 긴장도 있습니다. 나를 깊이 알기를 바라면서도 모두 들여다보이는 것은 부담스럽고, 복잡한 판단을 대신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최종 결정권은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 지능의 판단을 점점 더 많이 따르게 되었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그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낄까요. 내가 왜 그 선택을 따르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면, 그 힘을 내 것으로 가졌다는 말은 어떤 의미가 될까요.
신적인 힘을 손에 넣고 싶었던 인간이, 어느 순간 그 힘 없이는 판단하기 어려운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걱정합니다. 그와 함께, 인간이 스스로 얼마나 많은 것을 넘겨주고 싶어 하는지도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시 키트를 생각한다
오래전 《전격 Z 작전》의 키트를 다시 떠올려봅니다.
키트는 마이클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고, 위험을 먼저 발견했으며, 때로는 그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대신 살아주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지, 무엇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에는 결국 사람의 마음과 선택이 들어갔습니다. 키트가 가진 능력만으로 마이클의 삶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존재가 내 곁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동반자를 원하는 것일까요. 내가 가지지 못한 힘을 언제든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리는 것일까요.
아마 두 마음을 깔끔하게 나누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도움을 바라는 마음과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우리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AI가 더 강해질수록 그 안에 담긴 인간의 모습도 더 선명해질지 모릅니다.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고, 자신의 뜻이 닿지 않는 곳을 줄이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존재를 묻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적인 힘을 내 곁에 두면,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도 그만큼 쉬워질까요.
그리고 그 힘까지 손에 넣은 뒤에도, 우리는 무엇을 끝까지 인간의 몫으로 남겨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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