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남 주제별 글 모음

삶과 성찰

이 주제의 글을 최신 순서로 한눈에 살펴보세요.

홈으로 돌아가기

삶과 성찰 글 모음

글 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라벨이 삶과 성찰인 게시물 표시

농부는 나무의 크기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미지
올여름은 유난히 뜨거웠습니다. 거의 두 달 동안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았고, 한낮 기온은 자주 35도를 넘나들었습니다. 얼마 전 강변을 걷다가 낯선 풍경 앞에서 걸음을 늦췄습니다. 한여름인데 바닥에는 마른 나뭇잎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습니다. 산책로 주변의 풀은 푸른빛을 잃고 겨울 들판처럼 말라 있었습니다. 강의 물줄기도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물이 겨우 남아 흐르는 곳 가까이의 풀들만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넓은 강변의 나머지 부분은 겨울 억새밭처럼 보였습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가뭄을 걱정하며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풀과 나무가 타 죽는다.” 그 말이 무엇인지 그날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농부의 자식으로 자랐고, 한동안 농산물 유통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풀이 얼마나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압니다. 밟혀도 다시 일어나고, 잘라내도 다시 올라오고, 이제는 죽었겠다고 생각한 자리에서도 어느새 새순을 내미는 것이 풀입니다. 그런 풀이 한여름에 겨울처럼 말라 있었습니다. 나무들도 버티기 위해 잎의 일부를 말려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과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돌아오자 생명이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이틀 동안 비가 내린 뒤 어제 다시 같은 강변을 걸었습니다. 풍경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말라 있던 강에는 어느새 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겨울처럼 보였던 산책로 옆 풀밭을 자세히 보니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작은 푸른 풀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들판 전체가 푸르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분명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누가 풀에게 다시 살아나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풀이 지난 며칠 동안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쓴 것도 아닙니다. 비가 내렸습니다. 물이 돌아...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는 이유

이미지
  같은 사람을 두고도 누군가는 답답해하고, 누군가는 안타까워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살다 보면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먼저 보였습니다.  왜 저렇게 살까.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될 텐데.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달라질 텐데. 알려주고 싶었고, 붙잡아 주고 싶었고, 더 나은 길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관심이었고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잘되기를 바라며,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을 대하는 마음에 조금씩 여백이 생겼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보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가 먼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조부모의 기다림 어린 부모는 자녀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습관을 가르치고, 위험한 길로 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합니다. 부모에게는 그것이 책임이며 사랑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같은 말이 간섭이나 통제, 잔소리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반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주를 조금 더 넓게 품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수해도 기다려 주고, 부족한 것보다 잘한 것을 먼저 발견해 박수를 쳐 줍니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 믿어 줍니다. 부모와 조부모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책임의 무게와 거리가 다르니 대하는 방식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 보며 체험으로 알게 된 것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 걱정을 오래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억지로 바꾸어 놓은 것은 오래가지 ...

교회와 사회는 정말 분리되어 있을까? 사회라는 거울에 비친 교회의 모습

이미지
  많은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세상과 철저히 구별된 공동체로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거룩한 공동체이고,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되는 곳이니까요.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며,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아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깊은 질문이 찾아옵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다는 말이, 교회와 사회가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뜻일까요? 단순하게 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교회와 사회, 혹은 교회와 국가는 전혀 상관없는 두 세계처럼 따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회와 국가의 겉모습 속에는, 교회가 스스로 잘 보지 못하는 감춰진 자기 모습이 거울처럼 비쳐 나타나곤 합니다. 교회는 늘 하나님을 말하고, 말씀을 전하며, 거룩한 사명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정작 놓칠 때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의 무게중심은 어느새 사람의 인정과 박수, 세상적인 영향력과 자리 쪽으로 은밀하게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바라볼 때 단지 “세상이 악하다, 문제다”라고만 선을 긋기보다, 그 흐름 안에 투영된 교회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보게 됩니다. 성경 속 하나님은 삶과 사회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성경을 가만히 읽다 보면, 하나님은 성전 안의 닫힌 예배만 보시는 분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와 절기뿐만 아니라, 그들이 삶을 살아내는 재판 자리, 경제 활동,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대하는 태도까지 모두 함께 감찰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던 지점도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제사를 드리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정작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정의가 무너지고 약한 자가 철저히 외면당하는 모순된 현실을 지적한 것입...

사랑은 감정일까, 존재의 방향일까: 성경이 말하는 ‘나 없음’의 사랑에 대하여

이미지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쉽게 상처를 줄까요? 분명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어느 순간 서운함이 쌓이고, 기대가 생기고, 실망이 찾아옵니다.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마음 한쪽이 허전해지기도 합니다. 돌아보면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젊을 때는 사랑이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설레고, 하루 종일 그 사람이 떠오르고,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세상은 그것을 사랑이라 말했고, 나 역시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식으면 사랑도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겪고, 성경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감정일 수 있지만, 감정만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의 파도나 도덕적인 희생으로 좁혀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한순간의 뜨거움보다 한 사람이 평생을 걸어가는 존재의 방향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나는 아주 낯설고도 불편한 질문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나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조금씩 내려놓게 만드는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깊은 자리에는 생각보다 치열하고 서늘한 역설이 있습니다. 바로 ‘나 없음’이라는 말입니다. 1. ‘아가페’: 내가 만들어내는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눈이 멀 만큼 강력하게 끌리는 감정적인 사랑도 있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끼리의 깊은 우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장 깊이 보여주는 사랑은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상대가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시작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가 부족하고, 나를 실망시키며, 때로는 나를 아프게 할 때조차 쉽게 끊어지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경이 이 사랑을 인간이 억지로 쥐어...

성경은 왜 반복해서 ‘표적’을 보여줄까? 기적을 넘어, 삶의 방향을 비추는 이야기들

이미지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눈먼 사람이 앞을 보고, 바다가 갈라지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사건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이런 장면을 접할 때 가장 먼저 “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인간의 상식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신기한 현상 자체를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 속 사건들은 사람에게 어떤 방향을 생각하게 하고, 인간 자신과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 표적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요한복음 5장 39절 이 말씀처럼 성경은 단순한 옛이야기나 기록을 넘어, 인간과 삶의 방향을 비추는 흐름 속에서 읽히기도 합니다. 1. 표적은 사건 자체보다 ‘방향’을 가리킨다 표적은 어떤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와 비슷합니다. 길 위의 표지판이 자기 자신을 보라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성경 속 표적도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눈먼 사람이 보게 되는 사건: 단순한 육체적 회복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지 ,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오병이어의 사건: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공급과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만듭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단순한 놀라운 이야기라기보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과 생명의 문제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표적은 단순한 초자연적 현상보다, 그 사건이 사람 안에 남기는 질문과 방향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2. 성경은 반복해서 인간을 비춘다 이런 흐름은 신약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성경 전체 안에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의 많은 사건들은 단순한 역사 기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한계와 삶의 방향을 비추는 역할을 합...

내가 붙잡으려 했던 믿음, 나를 쉬게 한 평안

이미지
  1. 앎의 한계와 시선의 변화 믿음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어떻게 일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히 알아야 믿음도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싶었고,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고,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의 믿음은 어쩌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고, 무서운 것을 막아 주고, 길을 잃지 않게 붙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거의 전능한 존재처럼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도 피곤해하고, 말없이 고민하고, 실수도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순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아이는 아버지가 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변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2. 내가 만든 이미지와의 씨름 믿음의 여정도 그와 닮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을 믿으려 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고, 간절한 기도에 답해 주고, 불안한 마음을 금방 잠잠하게 해 주는 분을 생각했습니다. 마치 삶의 모든 위험에서 나를 구해 주는 슈퍼맨 같은 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했지만 기다려야 했고, 믿는다고 했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의 상은 흔들렸습니다. 내가 믿던 모습이 맞는 것인지, 내가 붙잡은 확신이 정말 진실한 것인지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흔들림은 실...

잔소리처럼 들렸던 부모의 말, 시간이 지나서야 보이는 사랑

이미지
  살다 보면 그 순간에는 이해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의미가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오래전 아들과 나눴던 짧은 대화가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2학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장난스럽게 물었습니다. “아빠가 집에 없어서 좋은 점이 뭐야?” 잠시 생각하던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잔소리 안 들어서 좋지.” 순간 저도 웃었습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잔소리를 했다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자주 하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가면 옷은 아무 데나 두지 마라. 책상 위는 조금 정리해라. 씻고 자라. 일찍 자라. 옷 좀 깨끗하게 입어라. 당시의 저는 그것을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해야 할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다르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리는 이유 시간이 지나고 나니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보입니다. 저는 옷이 중요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책상이 중요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아이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더 건강하게 자라면 좋겠고, 조금 더 좋은 습관을 가지면 좋겠고, 나중에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는 그저 반복되는 말로 들렸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의 걱정은 간섭처럼 느껴졌고, 조언은 부담처럼 들렸으며, 반복되는 말은 잔소리처럼 들리곤 했습니다.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던 말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보이는 것들 젊었을 때는 주로 말에 집중합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 내가 기분이 나빴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말보다 먼저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 바로 그 말 뒤에 있었던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말이 사랑에서 나온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상처가 ...

오래된 지혜가 말하는 ‘보는 자’와 ‘눈먼 자’

이미지
  요즘은 사람의 현재 모습을 대부분 ‘과거의 상처’나 ‘자라온 환경’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부부 갈등이 생기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불안과 우울이 찾아오면 과거의 결핍이나 방임을 원인으로 분석하곤 하죠.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람은 분명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어릴 적 무심코 들은 말 한마디, 반복된 무시와 결핍은 실제로 우리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기니까요. 하지만 삶을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꼭 과거의 상처와 환경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1. 같은 조건, 전혀 다른 해석 동일한 부모 아래에서 자란 형제인데도 한 명은 상처를 딛고 담담하게 살아가는 반면, 다른 한 명은 오래도록 피해 의식 속에 머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기 삶을 일구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부러울 것 없는 좋은 조건 속에서도 늘 불행과 결핍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죠. 결국 인간의 삶은 단순히 “무슨 일을 겪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전에 한 조직폭력배 출신의 인물이 했던 말이 깊은 잔상을 남깁니다.       “내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환경은 분명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모 역시 자신의 부모와 환경 아래에서 자랐을 텐데, 이 원인의 사슬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은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만든 존재가 아닙니다. 환경만으로 삶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인간의 삶에는 아직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2. 조건 너머의 진실: 삶을 바라보는 프레임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고전이자 지혜의 보고인 성경 역시 인간을 단순히 환경의 결과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하고 남부러울 것 없던 왕 다윗이 오히려 도덕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풍요로웠던 왕 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가치: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이미지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너무 쉽게 눈에 보이는 조건으로 판단하곤 합니다.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지로 한 사람의 됨됨이와 존재감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내 존재 자체가 무가치해진 것 같고, 남들과의 비교에서 뒤처지면 내 존재 자체가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가치는 세상의 판단 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1. 성취가 아닌, 존재 자체로 주어진 가치 성경은 인간이 무언가를 대단하게 성취했거나,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훌륭해서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내가 무엇을 증명해 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6절을 통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본질을 일깨워 주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마태복음 6장 26절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나 "걱정하지 말라"는 조언을 넘어섭니다. 우리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어떠한 성과를 내세우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발버둥 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새를 먹이시고 기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 도움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 사람은 이미 귀하다 세상은 좋은 직업, 안정된 수입, 그리고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그럴듯한 삶이 있어야 비로소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자리에서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너는 네가 증명한 만큼 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네가 실패한 만큼 하찮은 것도 아니다. 우리가 신앙...

그 사랑은 이유보다 먼저 있었다

이미지
  이유 없이 나를 품어준 사랑 나는 두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중 한 어머니는 나를 이유 없이 품어 키워주신 분이었다. 피로 설명되기보다 사랑으로 설명되는 어머니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받고 살았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 사랑은 더 크고 깊은 것으로 다가온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셨을까. 젖을 뗄 무렵부터였는지,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른 때부터였는지, 나는 이미 그 품 안에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오래 살았으니 정이 들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가족이었으니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말들이 너무 빈약하게 느껴진다. 그 사랑은 이유보다 먼저 있었다. 내가 착해서도 아니었고, 특별히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서도 아니었다. 어린 나는 그저 그 품 안에서 자랐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 안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에 가고, 세상을 배웠다. 은혜를 말하면서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해왔다. 인생에서 무너져야 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 인생이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내 안에는 평안과 마음의 여유, 기쁨과 따뜻함이 주어졌다. 나중에 어떤 지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참 희한해. 그런 일을 겪고도 쉽게 무너지지 않더라.” 그 말이 내 상태를 잘 설명해주었다. 내가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황을 이길 만한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평강이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은혜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하나님 앞에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이 길을 잘 가고 있는지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말로는 “은혜입니다”라고 하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살피고 있었고, 정작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